<더러운 잠>은 온전히 박근혜의 몫이어야 한다

by - 수요일, 3월 01, 2017

:최용찬 씨의 <그녀 옆에서 세상을 보는 법> 비판

<더러운 잠>의 두 주인공들. 하나는 유신공주며 다른 하나는 그 집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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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억압. 계급 사회가 그 사회 구성원들을 조직하는 방식이다. 이는 개인의 발전은커녕 파멸로 몰고가기도 한다. 전 사회적으로는 구성원들의 연대를 가로막고 그 사회의 계급 지배를 유지한다. 만약 당신이 차별과 억압이 없는 세상, 구성원들의 연대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이들을 이해하고 편들어주며 계급 지배 자체에 대해서도 맞서야 한다.
하지만, 연대가 쉽지 않다.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이해하고 편들어주기도 힘들어진다. 다투기도 하고 날선 논쟁도 한다. 때론 연대를 위해서 차이가 있는 것을 드러낼 필요도 있다. 사실 그런 차이 때문에 어디까지 편들어줘야 할지 불분명한 경우가 더 많다. 차별과 억압 받는 이의 처지 그 자체 때문에, 원래도 기울어진 세계를 더 기울게 보기도 한다.
특히 여성 억압에 대한 쟁점에서, 여성주의자들의 과도한 여성 중심주의나, 분리주의적 태도는 남성을 곤란하게 만든다. 남자가 억압의 기원이라고 하니 말이다. 얼마 전, 그림 <더러운 잠>에 대한 정희진 씨의 칼럼도 어찌나 불편했던지. 그런데 <물음>에 나와 함께 기고하는 최용찬 씨가 최근 <더러운 잠>에 대한 비판을 올렸다. 정희진 씨 칼럼 정도의 곤란함은 아니었지만, 기본적으로 페미니즘의 입장에 선 비판이었다. 나는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어 밝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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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제기하는 쟁점은 표현의 자유(풍자화)와 여성 억압(여성의 누드)이었다. 이 둘을 연결시키기 위해, 최용찬 씨는 존 버저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원제: Ways of seeing 보는 법들)을 인용했다. 존 버저는 ‘그림 속 여성 누드를 스스로를 대상화하는 여성의 시선에서 보라’는 제안을 했는데, 이를 <더러운 잠>에 적용한 것이다. 그에 따르면
“차별받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대상화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라며 옹호해서는 안된다. 만약 오바마가 벌인 중동에서의 학살을 비판한다고 오바마를 식인종 흑인 원숭이로 풍자한다면, 프랑스 <샤를리 에브도> 만평처럼 종교적 극단주의와 테러를 비판한다며 무슬림 여성을  ‘섹스 지하드’라고 모욕한다면, 이를 옹호할 수는 없다. 박근혜와 최순실을 비판하고 풍자하겠다는 ‘선의’를 인정하더라도 그 방식, 형식이 잘못이라면 비판해야 한다.”
호된 비판이다. 나처럼 비판하지 않고 있던 사람도 꾸짖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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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버저는 회화 속 여성 누드는, 내가 옳게 이해했다면, 지배자들이(따라서 지배적 의식이) 여성을 “보는 법”을 화가를 통해 그려낸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여성은 타인이 자신을 “보는 법”을 의식하는 존재다. 여성이 자신의 몸을 그림으로 보는 것이다. 벗겨진 채 말이다. 오늘날에 비춰보면, <맥심> 화보의 커버걸을 떠올리면 된다. 섹시하며 도발적인 여성의 모습은 오늘날 지배자들(지배적 의식)이 여성을 보는 법들 중 하나다. 이에 반해 19세기 유화 속 여성은 우아하고 차분하다. 여성은 이렇게 그 시대 지배계급의 지배적 의식대로 대상화된 자신을 의식하게 된다. 둘의 시간 차이가 크게 나기는 하지만, 어느 쪽이든 이는 당시, 계급 사회에서 여성의 차별과 억압 받는 처지에 닿아 있다. 최용찬 씨의 <더러운 잠> 해석은 이런 의미에서 읽을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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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의 비판은 과도하다. 내가 보기에 <더러운 잠>의 누드가 차별과 억압 받는 여성을 조롱하고 대상화했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은 물질적 현실의 결과물이지 그 자체가 원인은 아니다. 최용찬 씨가 인용하는 존 버저의 “다른 방식으로 보는 법”도 계급 사회에서 여성이 처한 현실이 예술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드러났는가 보는 방법일뿐이다. 즉 회화에서 여성이라는 범주를 읽어내는 방법이지, 그 자체가 한 작품 모두를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란 소리다. 또한 예술은 다양한 독해의 가능성을 담는다. 현실의 결과물이라 하여도 추상 수준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 그림을 두고 일어난 논란 역시 그런 해석의 다양성을 반영한다. 따라서 작가의 의도도 중요하며,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여지는가도 중요하다. 이 때문에 그림의 특정 대목에만 치중해 그 작품의 비판으로 온전히 삼는 것은 부당하다. 어떤 대목이 맘에 들지 않더라도, 체제 비판과 예술 비판은 구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용찬 씨는 그만의 감상법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더러운 잠>에서 최용찬 씨는 여성의 누드를 부각해 비판한다. 하지만, 억압자로서 박근혜를 비꼬는 측면을 더욱 크게 보는 사람들도 있다. 제목이 말해주듯이, ‘대통령이라는 사람이 세월호가 침몰하는 동안 잠이나 쳐자고 있었던 것이냐’ 하고 말이다. 또한 이 그림 속 누드 패러디의 소재들이 전하는 은유가 있다. 19세기 침대 위에 누워 최순실의 시중을 받는 ‘유신 공주’다. 여성 누드가 여성의 대상화라는 성격을 가진다는 걸 부정하지 못한다 해도 전체적으로는 다른 메시지를 주는 것이다. 그리고 최용찬 씨는 150년을 쉽게 뛰어넘었지만, 이 그림은 전체적으로 19세기 그림을 패러디한 것이지 21세기 <맥심>을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즉, 19세기 지배자들이 여성을 “보는 법”으로 여성을 보는 21세기가 아니라는 소리다. 내가 볼 때 이 그림은 ‘19세기를 사는 대통령’을 조롱하고 그를 우스운 사람으로 보게 할 뿐이다. 오늘날 여성의 어떤 모습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니 이 그림을 “흑인 원숭이”, “섹스 지하드” 처럼 차별과 억압의 현실이 뒤섞인채, 홧김에 내뱉는 단어들과 같은 수준이라고 하는 것은 나가도 너무 나간 것이다. 그 말들은 “표창원, 네 마누라도 벗겨주마” 따위의 저열함에 더 가깝다. 나는 이 그림이 그 정도로 저열하다고 생각 안 한다. 독해를 하고자 한다면 주변의 사정과 전체로서 작품을 이해하려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니 최용찬 씨의 비판은 여성 억압에 맞서며 차별에 저항하는, 체제를 향한 비판이자 회화 속 여성에 대한 발견은 될지언정, 이 그림에 대한 제대로 된 비판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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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는 여성의 억압과 차별받는 현실을 고발하고 거기에 맞서 싸운다. 그리고 이 싸움에 우리는 연대해야 한다. 여성주의자들, 최용찬 씨가 비판하듯, <더러운 잠>의 소재로 여성의 누드가 활용되어 여성들이 불쾌함과 조롱 당하는 느낌을 받았거나, 또는 다시 한 번 여성 억압의 현실에 대해 무감각한 남성 중심의 세계를 마주하는 불편함을 가졌다면 유감이다. 우리는 그렇지 않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함께 싸워야 한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이 그림, <더러운 잠>이 여성의 누드를 그렸다는 것만으로 여성을 대상화하고 조롱했다고 생각할만한 근거는 없다. 비록 최용찬 씨가 존 버거를 빌려 지적하듯, 여성의 누드가 회화 속에서 대상화되는 현실이 있더라도, 이 그림은 단지 ‘21세기에도 19세기를 사는 유신 공주가 대통령이랍시고 국민들이 죽어가는 동안 잠이나 쳐잤느냐’ 하고 따지는 풍자화일 따름이다. 최용찬 씨의 비판은 기울어진 세계를 더 기울게 본 것에 지나지 않다. 편들기만은 할 수 없는 이유다. <더러운 잠>의 풍자는 온전히 박근혜의 몫이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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