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에 대한 레닌의 사랑이 러시아혁명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나

by - 월요일, 3월 27, 2017

타리크 알리

Petro Vodkin 작, 출처 wikicommons


러시아소비에트연방(소련)의 창설자는 괴테를 흠모했던 라틴어 문학 애호가였고 그의 적들을 소설에 나오는 인물과 비교하는 것을 좋아했다.
 
문학이 러시아 정치 문화의 틀을 짰다. 그 영향력 아래 블라디미르 일리치가 성장했다. 공공연하게 정치적인 글은 차르 정권 아래 출판하기가 어려웠다. 이런 글을 쓴 저자들은 공개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철회하여 복권되기 전까지는 망명지에 숨어 있어야했다. 반면, 소설과 시에 대해서는 모든 경우는 아니지만 그래도 다소 관대한 편이었다.
 
검열의 꼭대기에는 당연히 차르가 있었다. 푸슈킨의 경우 인민의 아버지니콜라이 1세가 그의 작품들이 출판되기 전에 미리 읽겠다고 했다. 그 결과 일부 작품들은 출판이 금지됐고 어떤 작품들은 출판이 연기됐으며 가장 체제비판적인 작품들은 자신의 집이 언제 습격당할지 몰라 두려워서 푸슈킨이 스스로 없애버렸다. 지금 우리는 검열 없이 쓴 <예프게니 오네긴(Eugene Onegin)>에 어떤 내용이 들어 있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러시아 소설에는 유럽의 다른 어떤 나라와도 구별되는 방식으로, 다른 수단을 통한 정치 및 여러 가지 다른 영역들이 스며들어 있다. 정치적인 문학과 문학비평에 관해서 당시 러시아 지식인들은 선택지가 많았다. 그들은 저명한 비평가 비사리온 벨린스키와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니콜라이 고골 사이의 격렬한 논쟁을 몰두하며 읽었다. 1842년 발행된 고골의 신랄한 풍자소설 <죽은 혼>은 러시아에서 큰 반향을 얻었고 문맹자들을 위해 널리 낭독되었다.
 
그러나 고골에게 성공은 실패의 원인이 되었다. 그 뒤 고골은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고 악취나는 농민들에 대해 쓰며 문맹을 지지하고 나섰다. <죽은 혼> 재판본 서문에서 고골은 이렇게 썼다. “이 책의 많은 부분은 잘못 된 것으로 러시아에서 실제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저는 독자 여러분들이 나를 잘못을 바로잡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 부탁을 거절하지 말아 주십시오. 여러분들께 부탁합니다
 
벨린스키는 화가 나서 1847년 고골과 공개적으로 갈라섰다. 널리 읽힌 벨린스키의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를 받고 고골은 길고 잠 못 드는 밤을 보냈다.
 
나는 러시아 대중들에 대해 조금 안다. 나는 당신 책이 차르 정부와 검열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이지만 러시아 대중에게는 별 영향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페트로그라드에 차르 정부가 (<친구와의 서신교환>에서 뽑아낸 구절들로) 당신 책을 수 천 권 출판하여 아주 낮은 가격으로 판매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을 때 내 친구들은 낙담했다. 하지만 나는 친구들에게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책은 성공하지도 못하고 곧 잊힐 거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금 사람들은 책 자체가 아니라 책에 대한 논평들 때문에 그 책을 기억한다. 그렇다. 러시아 사람들은 여전히 덜 발달하긴 했지만 진실을 향한 깊은 본능이 있다.
[고골에게 보내는 편지 중에서]
 
나중에 비평가들은 자신들이 보기에 [러시아 대중의] 힘을 강화시키는데 불충분한 내용을 썼던 소설가와 극작가들을 더욱 거세고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런 지적 분위기 속에서 레닌은 성장했다. 문화적 수준이 높은 보수주의자였던 레닌의 아버지는 지역의 수석장학관이었고 교육자로서 매우 존경받았다. 일요일 오후에는 집에서 셰익스피어, 괴테, 푸슈킨 등의 책을 낭독했다. 울리아노프 가족과 (레닌은 차르 비밀 경찰을 따돌리기 위한 별명이었다) 고급문화는 뗄 수 없는 관계였다.
 
고등학교 때 레닌은 라틴어와 사랑에 빠졌다. 교장은 레닌이 라틴어 언어학자가 되었으면 하고 바랬다.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됐지만 레닌의 라틴어에 대한 열정과 고전에 대한 취향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 레닌은 원어로 로마시인 베르길리우스, 오비디우스, 호라티우스와 유베날리스의 시를 읽었고 로마 원로회의 연설문을 읽었다. 그는 20년여 망명 생활동안 괴테의 작품들을 탐독했는데 <파우스트>를 수차례에 걸쳐 읽고 또 읽었다.
 
레닌은 고전 작품들에 대한 자신의 지식을 191710월 혁명에 다가가던 시기에 잘 사용했다. 19174월 레닌은 러시아사회민주주의의 전통을 깨고 급진적인 주장을 펼치며 러시아에서 사회주의혁명을 해야 한다고 외쳤다. 그와 가까웠던 동지들 다수가 그를 비판했다. 이런 비판에 날카롭게 응수하며 레닌은 괴테의 걸작 <파우스트>[악마] 메피스토펠레스를 인용했다. “여보게, 모든 이론은 회색이고 영원한 것은 저 푸른 생명의 나무라네
 
레닌은 고전 러시아 문학이 항상 정치와 관련 맺고 있다는 것을 다른 많은 이들보다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가장 비정치적인작가들도 러시아 상황에 대한 그들의 경멸을 숨기기가 쉽지 않았다. 이반 곤차로프의 소설 <오블로모프>가 그 사례다. 레닌은 이 소설을 좋아했다. 이 소설은 상류 지주계층의 무력함, 게으름과 공허함을 묘사했다. 이 책의 성공으로 러시아어에 오블로모프주의라는 새로운 어휘가 생겼다. 이 단어는 전제정이 이토록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도록 도운 지주계급을 공격하는 개념이 되었다. 레닌은 나중에 이 [오블로모프주의라는] 무기력함이 단지 이 상층계급에만 해당되지 않고 차르 관료들과 그 아래의 상당부분에까지 스며들어 있다고 했다. 심지어 볼세비키 간부들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고 했다. 곤차로프가 들고 있는 거울은 보다 넓은 사회를 반영하고 있는 사례였다. 레닌은 논쟁을 벌일 때 종종 자신의 반대자들을 러시아 소설에 등장하는 불쾌하고 때때로는 보잘 것 없는 인물들과 비교하며 공격하곤 했다.
 
러시아 작가들(작가들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의 입장이 달라지는 지점은 차르 정권을 무너뜨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라는 점이었다. 푸슈킨은 니콜라이 1세의 왕위계승에 도전했던 182512월혁명당원의 봉기[데카브리스트의 난]를 지지했다. 고골은 농노제의 억압에 대해 풍자했다가 재빨리 후퇴해버렸다. 투르게네프는 차르주의를 비판했지만 테러를 설교하던 허무주의자들을 아주 싫어했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잠깐 무정부테러리즘을 지지했지만 페트로그라드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있은 뒤에는 테러주의에 대해 어느 정도 반대하는 입장이 되었다. 레닌은 톨스토이가 러시아 전제주의를 반대하였기 때문에 매우 좋아했지만 톨스토이의 신비주의 기독교와 평화주의에 대해서는 냉담했다. 어떻게 이토록 훌륭한 작가가 혁명가이자 동시에 반동가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대여섯 편의 글에서 레닌은 톨스토이 저작들에서 드러나는 깊은 모순들에 대해 풀어놓았다. 레닌이 보기에 톨스토이는 명쾌하게 [러시아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있었다. 그의 소설들은 경제적 착취와 농민들의 집단적 분노를 파악하고 표현하고 있었다. 하지만 치료법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톨스토이는 혁명적 미래를 제대로 상상하지 못하고 보다 단순한 과거 기독교의 유토피아 이미지에서 위안을 찾으려 했다. ‘러시아혁명의 거울로서 레오 톨스토이라는 글에서 레닌은 톨스토이 관점과 교리가 가진 모순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모순은 19세기 마지막 25년 동안 러시아인들 삶의 모순을 표현한 것이다이렇게 톨스토이의 모순은 레닌의 정치 분석에 유용한 길잡이가 되었다.
 
한편 레닌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들이 가진 힘에 대해서는 부정하지 않았지만 그의 고통에 대한 숭배(cult of suffering)'를 아주 싫어했다. 그러나 레닌의 문학에 대한 관점이 그대로 국가정책이 된 것은 아니었다. 혁명이 일어난 지 채 일 년이 되지 않은 191882<이즈베스티야> 신문은 어떤 작가의 기념비를 세울지에 대한 독자들의 선택을 물었다. 톨스토이 다음으로 도스토예프스키가 2위를 차지했다. 같은 해 11월 모스크바 소비에트 대표자들이 도스토예프스키 기념비 제막식을 열었고 상징주의 시인 바체슬라프 이바노프가 헌사를 했다.
 
아마도 레닌에게, 사실 급진파들과 혁명가들 전체 세대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작가는 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였다. 체르니셰프스키는 신부의 아들로 유물론 철학자이자 사회주의자였다. 그는 정치적 신념 때문에 수감되어 있던 페트로그라드 피터폴 요새에서 유토피아 소설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썼다. 이 책은 새로운 세대의 성경이 되었다. 감옥에서 몰래 반출되었다는 사실은 이 책에 더 큰 후광을 가져다주었다. 레닌은 마르크스를 알기 훨씬 전에(마르크스는 체르니세프스키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이 책을 통해 급진적으로 변했다. 이 급진적 민중주의자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레닌은 1902년 자신이 처음 쓴 정치 저작의 제목을 <무엇을 할 것인가>로 정했다.
 
체르니셰프스키 소설의 엄청난 성공은 기성 작가들을 매우 거슬리게 했다. 특히 투르게네프는 이 소설을 격렬하게 비판했다. 그러자 급진주의 비평가 도브롤류보프(학생들이 우리 디드로Diderot라고 부른)와 피사레프가 투르게네프를 통렬하게 비판했다. 투르게니프는 격노했다. 한 공개행사에서 체르니셰프스키를 만나게 된 투르게네프는 큰소리로 외쳤다. “너는 뱀이고 도브롤류보프는 방울뱀이야
 
이 소설의 어떤 점이 이런 논란을 불러온 것일까? 지난 50년 동안 나는 이 책을 세 번 읽으며 그것을 알아내려고 했지만 세 번 모두 실패했다. 이 책은 러시아 문학의 고전이 아니다. 이 책은 당시 시대를 반영하는 것으로 테러주의 이후에 러시아 지식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은 모든 면에서 의심할 여지없이 급진적이다. 특히 젠더 평등과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서 그렇다. 또한 어떻게 투쟁할 것이고 어떻게 적을 묘사할 것이고 어떻게 특정 규칙에 따라 살 것인가라는 점에서도 그렇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체르니셰프스키를 싫어했지만 그를 무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보코프는 러시아어로 쓴 마지막 소설 <선물>에서 50페이지에 걸쳐 체르니셰프스키와 그 동료들을 하찮게 만들고 조롱했다. 그는 하층 출신 체르니셰프스키에 대한 동시대 부유층 작가들의 태도에는 아주 분명한 계급적 오만이 있었다고 인정했다. 개인적인 자리에서 톨스토이와 투르게네프는 체르니세프스키를 빈대 냄새나는 신사이라고 불렀고 갖가지 방법으로 그를 비웃었다라고 썼다.
 
그들의 조롱은 부분적으로는 질투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의 우월의식에 대한 비판이 젊은이들 사이에 아주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투르게네프의 경우 토지 자산을 폐지하고 토지를 농민에게 분배하는 혁명을 원하는 저자에 대한 뿌리 깊은 정치적 적대감 때문이기도 했다.
 
레닌은 1905년과 1917년 혁명 사이에, 망명지에 있는 그를 방문하는 젊은 볼세비키들이 체르니셰프스키의 책이 잘 읽히지 않는다고 그를 놀리면 불평을 늘어놓곤 했다. 레닌은 이들이 너무 어려서 그 책의 깊이나 전망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그 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마흔 살이 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때가 되면 체르니셰프스키의 철학이 간단한 사실들에 바탕하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 우리는 아담과 이브가 아니라 유인원의 자손이다. 삶은 짧은 생물학적 과정이고 따라서 모든 개인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어야 한다. 이것은 탐욕, 증오, 전쟁, 이기주의, 계급이 지배하는 세계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회혁명이 필요하다는 사실 말이다. 이 젊은 볼세비키들이 레닌과 함께 스위스 산을 등산할 때 그들은 아직 마흔 살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혁명은 발발했다. 지금은 레닌 사상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역사가들이 체르니셰프스키 저서를 읽는다. 박식한 당의 진보주의자들은 즐겁게 마야코프스키를 향해 나갔다. 그러나 레닌은 아니었다.
 
레닌에게 깊숙하게 뿌리내린 고전주의는 레닌이, 러시아혁명 전에 그리고 러시아혁명 동안 함께 이뤄진 예술과 문학의 흥미진진한 새로운 발전들을 받아들이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레닌은 러시아와 다른 나라들의 모더니즘을 수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마야코프스키와 구성주의자들의(constructionist) 예술적 아방가르드[전위주의]는 레닌의 취향이 아니었다.
 
시인들과 예술가들이 레닌에게 자신들도 푸슈킨과 레르몬토프를 좋아하며, 자신들이 예술의 이전 형식들에 도전하여 다르고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혁명가들이고 이것이 볼세비즘과 혁명의 시대에 일치되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소용없었다. 레닌은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그들은 무엇이든 원하면 쓰거나 그릴 수 있었다. 그런데 레닌에게 그들의 작품을 인정하라고 강요할 필요가 있었을까? 레닌의 많은 동료들은 이 새로운 흐름에 훨씬 더 우호적이었다. 부하린, 루나차르스키, 크룹스카야, 콜론타이 그리고 트로츠키도 어떻게 혁명의 불꽃이 새로운 전망을 열어젖혔는지 어느 정도는 이해하고 있었다. 러시아 아방가르드 운동 내부에도 갈등과 주저함과 모순이 있었다. 정부 내에서 그들의 지지자로는 교육인민위원회의 루나차르스키와 같은 곳에서 일했던 레닌의 아내 크룹스카야가 있었다. 내전 동안 종이 부족 때문에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교육인민위원회에서 선동 리플릿을 낼 것인가 마야코프스키의 새로운 시를 출판할 것인가? 레닌은 선동리플릿을 내야한다고 주장했다. 루나차르스키는 마야코프스키의 시들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논쟁에서 루나차르스키가 이겼다.
 
레닌은 프롤레타리아 문학과 예술이라는 개념에 대해 적대적이었다. 그는 최상의 부르주아 문화가 (그리고 그 이전의 고대 문화를 계승한 문화도) 기계적이고 죽은 공식에 따라 문화수준이 아주 낮은 나라로 [시공을 초월하여 순식간에] 전파되지 않으며 그런 지름길은 없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레닌이 죽은 뒤 끔찍한 시기 동안 도입된 똥물 같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통해 결정적으로 입증됐다. 창조성은 마비됐다. 모든 생명들이 존재의 이유를 갖는, 필연의 왕국에서 자유의 왕국으로 도약하는 따위의 일은 소련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다른 곳에서도 그런 일은 없었다.
 
타리크 알리의 새 책 <레닌의 딜레마들: 테러리즘, 전쟁, 제국, 사랑, 반란>이 다음달 Verso 출판사에서 발행될 예정이다.
 
원문: 영국 <가디언> 3월 25일자 기사
 
번역: 최용찬
(오역이나 부적절한 번역에 대한 지적은 언제나 환영합니다. free.yongchan@gmail.com)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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