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민낯

by - 화요일, 3월 21, 2017


출처: anniekoh.tumblr.com
그녀를 만난 것은 지하철 안 이었다. 틈새 하나 없이 촘촘한 4호선에 이쑤시개처럼 박혀 있다가 가까스로 2호선으로 갈아타고 짜증과 안도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을 때였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거울에 매달려 있었다. 흔들리는 전철 바닥은 구두 뒷굽으로 단단히 고정하고 붓과 연필을 든 손을 재빨리 움직여 아이새도우와 아이라인, 볼터치를 하나씩 완성해 나가고 있었다.

사람들은 잠시 그녀를 곁눈질하다가 이내 이어폰 음악 속으로 잠기거나 휴대폰 액정에 불을 뿜으며 한가로운 전투를 벌였다. 이제 어느덧 익숙한 풍경이었다.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늦잠을 잔거지. 화장은 집에서 미리미리 하고 나오면 되지 않나. 여기가 자기 안방도 아니고라고 생각하며 이런 데서까지 화장을 꼭 해야 하나? 겉모습에만 신경 쓰고 창피한 줄은 모르는 여자로 여기며 무심하게 고개 돌렸다.
 
그녀를 다시 만난 건, 정확히 말해 그녀를 다시 떠올린 건, 지난 34일 청계광장에서다. 세계 여성의 날을 기념하여 범페미네트워크에서 주최한 페미답게 쭉쭉간다문화제가 열렸다. 여기서 그녀들은 낙태죄 폐지, 모두에게 기본소득, 차별금지법제정, 동일노동·동일임금·동일민낯, 생리대가 참 비싸다를 주요 의제로 발언 하고 요구도 외쳤다. 나에게는 처음 듣는 생소한 주장이 여기 있었다. 동일노동·동일임금은 잘 알고 있었지만 동일민낯이라니?
 
국어사전에 민낯은 화장하지 않은 얼굴이라고 나온다. 그러나 현실에서 쓰일 때는 좋지 않은 어감을 가진 단어다. “권력의 민낯”, “보수의 민낯”. 민낯이라는 검색어로 최근 뉴스를 찾아보면 이런 문구들이 나온다. 민낯은 가려야할 약점과 잘못이다. 부끄러움과 수치도 모른 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본래 모습이다. 우리 사회에서 여성들의 민낯은 화장으로 완성해야할 쌩얼이며, 깨끗하지 않은 미완성의 얼굴인 것이다. 그래서 화장은 대다수 여성 노동자가 출근 전에 반드시 입어야 하는 유니폼이다.
 
마이크를 잡은 그녀가 말했다. “CGV에서는 화장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꼬질이라는 벌점을 받고 임금차별로까지 이어집니다. 화장품 사고 머리하고 화장하는 돈과 시간 모두 노동으로 이어지고 귀찮은 일인데 ... 뚝딱하면 화장이 되는 것도 아니고 스킨에 로션, 기초부터 바르고 시작하는데 화장한 얼굴이 기본 값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 여성 알바노동자들에게 과하게 가해지는 꾸미기 노동, 감정 노동은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지하철에서 화장하는 그녀를 보고 게으르다’, ‘외모만 집착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여성차별에 반대한다고 떠벌이던 나는 도대체 여성들의 현실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체감하고 있는가? 남자직원들 커피잔을 치우며, 그들보다 적은 임금을 받는데, 그 월급을 쪼개 비싼 화장품 사서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까지 해야 한다. 문화제에서 그녀는 말했다. “알바하는 까페에 화장을 하지 않고 출근하면 점장에게 엄청 혼나고 원래 하던 카운터 일이 아니라 청소나 설거지를 해야 한다그런데 그렇게 필사적으로 화려하게 화장을 하고 가면, 이번엔 야한 여자로 취급받고 성희롱의 대상이 되기 일쑤라고 한다.
 
출근길, 꽉 차서 도착한 마을버스나 지하철 문이 열릴 때마다, 괴력을 발휘해 밀치고 들어갈 것인가 지각을 할까를 더 이상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나는 간절히 꿈꾼다. 거의 매일 마주치는 그들과 마을버스 안에서 지하철에서 정답고 편안하게 인사 나눌 수 있는 사회를 꿈꾼다. 그리고 민낯의 그녀가 지하철에서 화장하지 않아도 되는 사회, 그녀들이 야구모자 그늘 아래. 선글라스와 마스크 속으로 민낯을 숨기지 않고 언제 어디서든 활짝 웃을 수 있는 동일민낯의 사회를 꿈꿔본다.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 솔직함을 드러내는 것이 아름다움이 되는 사회가 자본주의너머 저편에 분명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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