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막장”, 택시 노동의 경험

by - 수요일, 2월 22, 2017



❄︎
한참을 태백산 일대 석탄 산업의 역사를 탐구하고 있었다. 석탄 산업의 흥망성쇠와 함께 부침(浮沈)한 광부들의 이야기, 그들의 “막장”같은 삶이 궁금했던 것이다. 이를 정리해 ≪태백산 광부 이야기: “막장”의 삶과 투쟁≫이라는 제하에, 작은 결과를 내놓을 생각도 했다. 
그러다 가진 돈이 다 떨어져 쓰던 글을 멈추고 일을 찾아 나섰다. “알바”라도 괜찮았지만, 정작 오라는 데가 없었다. 불황을 절감했다. 헌데 택시 회사에 가니 말 그대로 “어서 오십쇼” 했다. 깜짝 놀랐다. 여기는 호황인가? 택시 일‘이라도’ 하겠다는 내게 어떤 지인들은 택시 기업들을 악평했다. 대게가 ‘힘들다’는 소리와 함께 나를 격려하려는 취지였다. 나는 한숨이 나왔다. 직전까지 광부들 삶을 탐구했던 탓일까, 탄가루 마셔가며 그 고된 일을 하던 광부들의 속사정이 저절로 내 사정과 겹쳤다. 
7,80년대 광부들은 인적 드문 태백산까지 와 탄을 캤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조금만 고생하면 한 몫(?) 잡을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오기도 했다. 실제로 정부의 석탄 중심 정책과 이로부터 탄력을 받은 석탄 기업들의 성장이 그런 꿈을 부추겼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그 배경에는 이 시기 닥친 경제 위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당시 정부는 경제 위기와 함께 찾아온 석유가 인상으로 석탄 사용을 확대했고, 기업은 거의 인력에만 의존하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석탄을 캐고자했다. 이에 반해, 갑자기 생활고에 처한 많은 사람들은 무슨 일이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더 급한 사람일수록 이곳까지 올 가능성이 높았다. 

❄︎
생각해보면 잠실 교통회관에서 택시 운전 교육을 받던 날에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오백 명은 들어갈 것 같은 강당을 막 시험을 통과한 사람들이 절반 넘게 차지하고 앉아 교육이란 걸 받고 있었다. 99%가 사내들이었고 남루한 차림이 대부분이었다. 나도 이런 사람들 중 한 명이었다. 강사들 대부분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지만, 특히 택시 기사 출신이라는 사람의 교육은 나같은 사람을 달래고 고무하는 일에 집중되었다. "저도 여러분처럼 마지막이다 하고 택시 일을 시작했습니다. 사업하다 망해서 엄청난 빚을 졌지요. 먹고는 살아야 하니까 이 일을 했습니다. 그래도 3년 무사고에 남보다 좀 덜 쉬고 고생하면, 개인택시 면허도 생기고, 내 차라도 사면 내 맘대로 쉬면서 일할 수 있습니다. 꿈을 갖고, 손님들한테도 친절하게 하며 열심히 일하세요"하는 “꿈같은 교육”이었다. 사실, 여기 앉아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어렴풋하게나마 이런 꿈을 가지고 있을지도 몰랐다. 내 옆에 삼십대 아저씨는 애가 셋이나 있고 얼마 전까지 새벽 대리운전을 했었다. 앞에 앉았던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는 나이 들어 이 일이라도 해야 먹고 살 수 있다고 했다. 먹고 살려다보면, 사람은 광부도 되고 택시 기사도 되고 한다. 

❄︎
방금 새로운 일을 시작한 사람이라면 저도 모르게 직전까지 하던 일과 자꾸 비교하기 마련이다. 나는 방금 전까지 열차를 타고 태백산 일대를 돌아다니며 옛 탄광과 탄광촌을 답사하고 사진을 찍고, 서울에 돌아와서는 자료를 찾아 도서관을 여기저기 찾아 다녔었다. 나는 그렇게 하여 3,40여 년 전 광부들에게 조금씩 다가갔고, 그들의 삶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택시를 운전하고 있었다. 그리고 점차 택시 운전을 하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이 택시 일이 3,40여 년 전 광부들의 “막장” 과 닮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제일로, 시간당 최저임금으로 쳐주는 월급, 여기에 한 푼이라도 더 받으려면 손님 한 명이라도 더 태워야 하는 경쟁 체제가 불만이었다. 문제는 그뿐이 아니었다. 그날 그날 사납 액수를 다 채워야 하는데, 액수가 모자라면 내 돈으로라도 채워야 했다. 심지어 무슨 사정으로 결근이라도 하는 날엔 가불을 해서라도 빠진 날 사납은 꼭 내야  했다. 아랫돌 빼서 웃돌 괴듯이 말이다. 일하면서 점점 분명해졌지만, 사납제는 택시 기업들이 자기네 이윤만큼은 절대 손해보지 않겠다는 사악함의 결과물이었다. 전국의 택시 기업들이 이 사납제를 하고 있다.
사납제는 기본급과 보너스가 맞물려 있는 것이다. 기본급이라는 것에는 기만적인 셈법이 숨어 있다. 정규직 노동자들은 주 40시간을 기준으로 해 임금이 정산된다. 그러나 택시 업계는 하루 6시간씩 6일, 주 36시간을 기준으로 한다. 최저임금으로 계산되는 기본급이 더 낮아지는 셈이다. (계약기간도 1년으로 정해져, 이렇게 되면 정규직이나 다름없다는 헛소리에도 불구하고 법적으로는 주40시간 미만의 비정규직이다. 단, 모든 택시 회사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이 기본급을 받으려면 사납을 빠짐없이 다 채워야 한다. 하지만 택시 기사가 하루 6시간을 일해 십만 원도 더 되는 사납을 채우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일주일 중 6일을 대략 10시간 동안 차를 달려서 그 사납을 다 채우고 나면 그것이 한 달 후 기본급이 되고, 사납을 제외하고 남은 돈이 일종의 보너스가 된다. 이렇게 해서 이 둘을 합친 액수가 그 달 기사가 번 월급이 되는 것이다. 나의 경우 매월 평균 150만 원 안팎에 지나지 않았다. 하루 평균 대략 10시간, 주 6일을 일하고 이 돈을 벌었다! 이에 반해, 어떻게든 사납을 받아가는 택시 기업은 한 명이라도 기사를 더 채용하는 게 돈을 버는 것이다. 나를 보고 “어서 오십쇼”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그러고 보면 광부들의 처지도 비슷했다. 탄광 회사는 ‘도급제’라는 악명 높은 임금제를 가지고 있었다. 도급제란 회사가 석탄 생산량∙동발(탄광 내 기둥) 설치 숫자∙석탄 질 등 수십 가지 단가표에 따라 그날 일한 결과를 평가해 개인별로 나눠 월급으로 지급하는 것을 말했다. 그런데 단가표는 성과를 매기는 채점표로 관리자들이 각종 핑계를 대어 낮게 채점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1톤짜리 광차를 다 채우도록 해놓고, 0.8이나 0.9톤이라 적는 식이었다. 부족한 분은 고스란히 월급에서 뺐다. 일하는 시간도 기만적이었다. 광부들은 일주일 중 6일, 보통 하루 10시간 정도를 일한 것으로 쳐 임금을 계산했다. 법은 갱내 노동의 특수성 때문에 근로 시간을 8시간으로 정해두었지만 이를 어기는 곳이 태반이었던 게다. 여기에 갱도에 들어가는 시간을 기준으로 해, 입갱 전후 작업 준비와 종료에 필요한 시간을 쳐주지않는 곳이 허다했다. 따라서 실제 일하는 시간은 11~12시간씩 되었다. 이렇게 해서 받은 월급은 탄광 회사 규모에 따라 달랐지만, 평균적으로 당시 전체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조금 웃도는 수준이었다. 


 ❄︎
이뿐만이 아니다. 위와 같은 사정으로 인해 광부와 택시 기사는 경쟁적으로 일하며 목숨까지 담보로 한 온갖 사고를 당하고 직업병에 걸리는 것조차 닮았다. 사고나 질병은 사실 적절한 장비나 조치들로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도급제 때문에 광부들은 탄을 조금이라도 더 캐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사정은 탄 캐는 일 외 다른 일을 부차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사고가 났다. 가장 흔한 사고가 갱 붕괴였다. 석탄 기업들은 나무로 된 동발을 썼는데 생산비 절감을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무는 지하수에 썩고  시간이 흐르면 휘었다. 이 때문에 점검을 게을리하면 동발이 무너져 사고로 이어졌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가스 폭발 사고였다. 탄을 캐면 탄에서 유출된 가스가 갱내에 가득찼다. 환풍기와 가스 탐지 작업이 필요했지만, 기업들은 생산비 절감 때문에, 노동자들은 관리자에게 말해봤자 하는 생각과 일단 탄을 캐야 해서 무시하곤 했다. 그러다 가스에 불이라도 붙으면 갱이 폭발하고 붕괴했다. 결국 광부는 또 다시 목숨을 걸어야 했다. 이런 위험 속에서 일하며 광부들은 골병이 들고 폐에 석탄 가루가 가득 차 죽는다는 진폐증에 걸리기 십상이었다. 
그 유명한 “막장”이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나왔다. 이 말은 연극의 마지막 장이라는 뜻도 있지만, 광부들이 파나가는 갱도 끝을 뜻하기도 한다. 광부들은 여기에 빗대어 자신의 삶을 “막장” 인생이라고 불렀다. 파도 파도 끝없이 들어만가는 막장처럼 헤어날 길 없는 노동의 삶을 빗댔다. 그 막장 인생은 최악의 경우 죽어야만 끝났다. 그리고 석탄 기업은 탄을 가져다 도시 연탄 공장에 팔면 끝이었다.

❄︎
사납제 같은 임금제는 택시 기사에게 한 사람이라도 더 태워야 돈을 번다는 생각을 강요한다. 하지만 차 막히는 도로에서 맘처럼 되지 않는다. 이때 택시 기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다른 게 아니다. 과속 그리고 별별 모험. 예컨대 잦은 차선 변경, 전용 차선 위반, 끼어들기, 꼬리 물기, 신호 위반 등등. 과속과 이런 종류의 모험들은 주변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다. 하지만 정작 위험해지는 사람은 모험을 하는 당사자다. 최악의 경우 각종 사고다. 밤엔 더 그렇지만, 대낮이라도 교차로에서 일어나는 사고들은 끔찍하다. 회사 관리자가 사고 후 보험 처리를 위해 확인하는 차내 동영상을 보곤했는데, 차가 종이짝처럼 구부러지거나 접히는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떨렸다. 
이렇게 긴장감(?) 넘치는 운전을 하는 것에 반비례해 쉬는 시간은 짧아진다. 사납의 압박에 계속 짓눌리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신을 차리고 눈을 크게 뜨고 손님을 찾아보지만 반대로 몸은 더 피곤하다. 결국 한 눈을 팔지 않아도, 보여야 할 것이 안 보여서 사고가 난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피곤한 운전 끝에 졸지 않으려고 애쓰며 회사로 돌아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저 앞에서 사람이 손을 흔들었다. 한 명만 더 태우고 가겠다는 욕심이 들었다. 하지만, 피곤에 쩐 내 몸은 솔직했다. 횡단보도를 건너는 자전거 탄 사람이 옆에서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다행히 자전거만 부딪히고 사람은 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주문처럼 말하며 얼마나 안절부절했던지, 지금도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다. 
이런 상태가 지속되는 와중에, 밤에 운전을 하면 결과는 더욱 위험할 수 있다. 더 안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운전자는 손님을 기다리며 조금씩 잠을 청한다. 심야 운전의 사납이 주간보다 더 비싼 가혹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렇게 일하면서 택시 기사는 사고가 안 나더라도, 어깨, 허리 등의 근골격계 질환, 일명 “디스크”를 앓는다. 나보다 어린 직장 동료 중 한 명은 택시 일을 한지 3년이 되었는데, 그 사이 허리디스크에 걸려 3개월을 쉬어야 했다. 치료는 자기 돈으로 했다. 그는 자신의 운전 습관이 안 좋았기 때문이라며 스스로를 탓했다. 회사도 그 동료 탓을 하며, 병원비가 싸다는 곳을 소개해준 것이 고작이었다. 회사는 사납만 받으면 끝이다. 

❄︎
7,80년대 광부들의 삶과 21세기 택시 노동자의 그것이 내 머리 속에서 자꾸 겹쳤던 것은 이렇게 우연이 아니었다. 일을 시작하기 전 사람들이 격려한답시고 되려 나를 우울하게 했던 것도 이런 까닭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자연스럽게 태백산 일대의 “막장”을 떠올리고 말았지만 말이다. 3,40여 년 전 광부들은 태백산 땅 속 얼키고 설킨 갱 끝 막장에서 석탄을 캤다. 21세기 초 택시 기사는 거미줄처럼 엮인 도시의 도로라는 막장에서 손님을 “캔다”. 광부가 탄을 싣고 갱안을 들락날락했던 탄차에 몸을 맡겼듯이, 손님을 싣고 도시 안을 오락가락하는 택시에 몸을 맡기고 말이다. 
최근에는 또 다른 일로 막장이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도를 넘거나 예상을 넘어서는 “막장 드라마”를 떠올리는 정부의 부패 사건 때문이다. 아마도 적지 않은 사람들은 광부들의 막장, 택시 기사들의 막장을 모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드라마 보다 더 어이없어 하는 까닭은, 그들 간의 은밀한 거래도 거래지만, 사실 그 정치가와 기업가들이 지배하는 노동 현장의 “막장” 같은 현실 때문일 것이다. 예를 들면,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 죽은 많은 젊은 여성 노동자들처럼 말이다. 요즘엔 “막장”이 산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연관 기사

0 개의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