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버저의 <다른 방식으로 보기>와 <더러운 잠>

by - 화요일, 2월 28, 2017

그녀 옆에서 세상을 보는 법
- 존 버저 <다른 방식으로 보기 Ways of Seeing><더러운 잠>

 
 
풀밭위의 점심_에두아르 마네_1863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지은 존 버저는 1926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올해 12일 세상을 떠난 마르크스주의자다. 그는 미술비평가, 사진이론가, 소설가, 다큐멘타리 작가, 사회비평가로 활동했다. 중년 즈음부터 프랑스 알프스 산록 농촌 마을에서 농사와 글쓰기를 함께 해 왔다.
 
<다른 방식으로 보기>는 회화, 이미지와 광고 등을 통해 보는 것을 분석한다. 이 책 내용 가운데 내게 가장 충격적인 주장은 여성이 보는 방식이 남성과 다르다는 것이었다. 책의 몇 구절을 인용해 보면,
 
“(여자)의 자아는 찢겨 두 갈래로 갈라진다. 방을 가로질러 갈 때 또는 아버지가 사망하여 울 때도 그녀는 걸어가거나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한 여자가 자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갖는 생각은 이렇게 타인에게 평가받는 자기라는 감정으로 대체된다.”
 
남자들은 행동하고 여자들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남자는 여자를 본다. 여자는 남자가 보는 자신을 본다. 그리하여 여자는 그녀 자신을 시선의 대상으로 바꿔 놓는다.”
 
존 버저는 주체가 아니라 대상이 된 여성의 사례로 유럽 누드 회화를 든다. 그에 따르면, 벌거벗은 몸은 그저 아무 것도 입지 않은 몸이지만, 누드는 보여지는 특별한 대상이다. 그래서 누드는 복장의 한 형태다. 누드에서 누가 보는 사람이고 누가 보여지는 대상인지는 명백하다. 보는 남자와 보여지는 여자라는 관계는 역전되지 않는 권력 관계.
 
역전되지 않는 권력 관계라고 하니 떠오르는 게 있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이다. 메갈리아의 미러링은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를 역전시켜 언어로 표현한 것이다. 존 버저는 누드화의 여성들을 남성으로 바꿔 생각해 보라고 했다. 그게 기존 관념에 대해 얼마나 큰 폭력인지 떠올려 보라고 했다. 메갈리아는 존 버저의 말을 따른 셈이다. 된장녀를 한남충으로 창녀(몸 파는 여자)를 창놈(몸 사는 남자)으로 역전시켜서 말이다. 많은 남성들이 메갈리아의 미러링에 충격을 받은 듯하다. 일부 남성들은 메갈리아의 폭력적대응에 크게 분개했다. 그런데 여성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아니 태어나기 전부터 사회와 남성에게 충격을 받고 또 폭력을 당해, 충격과 폭력에 익숙해지고 심지어 이런 충격과 폭력이 당연한 것이라고 분노해서는 안 된다고 배운다. 그런 여성들이 보기에도 노골적이라 여길 그림이 있다.
 
<풀밭위의 점심>은 에두아르 마네의 작품이다. 검은색 정장을 차려입은 두 남자 사이에 벌거벗고 앉아 있는 여성이 도드라져 보이는 그림이다. 근대 회화의 탄생을 알리는 걸작이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림이 그려진 뒤 150여년이 지나 2017년을 사는 우리가 이 그림이 표현하고 있는 모습, 철저하게 대상화된 여성을 현실로 인정하고 당연하다고 수용할 수는 없다. 에두아르 마네는 논쟁이 되고 있는 <더러운 잠>의 원작 <올랭피아>도 그렸다. 존 버저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에서 마네의 <올랭피아>가 누드가 가졌던 전통적 이상을 깨뜨렸다고 평가했다. 물론 그것을 대체한 것은 창녀의 리얼리즘일 뿐이어서 여성의 대상화는 광고, 저널리즘, 텔레비전 등에서 계속 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여성을 대상화했다고 해서 명백한 범죄가 아닌 이상 처벌해서는 안된다. 그래서 <더러운 잠>을 핑계로 표창원 의원을 징계한 것은 잘못이다. ‘표창원 부인을 벗겨주마라고 대응하는 저들에 위선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더러운 잠>처럼 누드화를 패러디해서 박근혜와 최순실을 비판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차별받고 억압당하는 사람들을 조롱하고 대상화하는 것을 표현의 자유라며 옹호해서는 안된다. 만약 오바마가 벌인 중동에서의 학살을 비판한다고 오바마를 식인종 흑인 원숭이로 풍자한다면, 프랑스 <샤를리 에브도> 만평처럼 종교적 극단주의와 테러를 비판한다며 무슬림 여성을  섹스 지하드라고 모욕한다면, 이를 옹호할 수는 없다. 박근혜와 최순실을 비판하고 풍자하겠다는 선의를 인정하더라도 그 방식, 형식이 잘못이라면 비판해야 한다.

이 책을 읽고 어렴풋이 깨달았다. 그동안 나는 옆지기와 대화에서 대체로 합리적으로 솔직하게말해왔는데 여성 문제에 대해서는 왜 그리 대화가 어려웠는지, 그 실마리를 이 책에서 찾았다. 내가 보는 방식이 그녀와 달랐던 것이다. 그동안 나는 그녀 옆에 서서 그녀가 바라보는 세상을 함께 바라보며 이야기한 게 아니었다. 내 시선은 항상 그녀와 마주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그녀를 상대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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