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사랑은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

by - 화요일, 2월 21, 2017

파블로 피카소, 해변의 두사람/figures of the seaside(1931)
왜 사랑은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가(1972)
 
데이브 위저리(Dave Widgery)*
 
성적 사랑은 규칙을 깨뜨리는 운동이다. 예의범절을 무너뜨리는 감각들의 반란이다. 시간이 달라진다. 순간이 한 시간 동안 지속되고 하룻밤은 수많은 분()들로 쪼개진다. 술집에서 침대로 다시 버스 정류장으로 대화는 보름동안이었던가 아니면 하룻밤이었던가. 물건들에 갑자기 의미가 생긴다. 운하에 떠오른 물풀이 바다에 핀 꽃이 된다. 딱딱했던 마음이 느낌으로 차오른다. 닿는 손길이 울림이 되고, 신경은 제멋대로며 저절로 손뼉 친다. 눈에는 불이 켜지고, 끊임없이 겉모습이 변하는 세계 속에서 눈멀어 버렸다. 사랑은 우리가 경험하는 가장 친밀한 교감의 찰나다. 사랑에 대한 세간의 말들은 모두 진실이다. 행복한 결말만 빼고 말이다.
 
자본주의에서 사랑한다는 것은 너무 쓰다. 사랑은 이제는 어색해진 느낌을 되찾는 것이다. 규칙도 없고, 가격도 없고, 권력도 없는, 그런 감정을 품는 것이다. 사랑의 침대에서 주체들은 서로 온전히 이타적이다. 대가 없이 소중한 것들이 오가고 서로를 기쁘게 하는 게 기쁨이 된다. 부모나 교사들 그리고 서로가 억누르고 회피하고 그저 없애버리라고 말했던 것을 되찾는다. 사랑은 잠자고-일하고-노는, ‘정상적이고 색깔 없이 무미건조한 삶을 뒤집어버리는 혁명 상태다. 연인들은 짧은 가석방을 받아 산책을 허락받는다. 뚝방에 핀 꽃들 뒤, 돌멩이에 항구의 물들이 소용돌이치는 것이 보이고 갑작스레 나타난 먹구름에 넋을 잃는다. 성적 사랑은 보관할 수도 축적할 수도 전시할 수도 없다. 좀 슬지도 녹슬지도 않는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맹렬히 발전한 우리 내부의 개인주의는 보통 사랑에서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감정과 경쟁에서 성공하는 것 사이에서 갈등할 때, 대체로 우리는 감정을 믿지 말라고 배웠다. ‘높은 곳에 이르고 또 스스로 성공하기를 원한다면감정이 아니라 배운 데로 행동해야 한다. 이런 선전들이 우리를 가르치고 이런 구호들이 우리를 짓누른다. “주지 말고 얻기만 해라! 가능한 건 모두 챙겨라! 1등이 되어라!”, “그대의 존재가 적을수록, 그대의 생명이 덜 표현될수록, 그대는 더욱더 많이 가지게 될 것이고, 그대의 외화된 삶(자본_역자)은 더욱더 커질 것이며, 그대의 소외된 본질(자본_역자)은 더욱더 저장될 것이다라고 마르크스는 썼다.** 하지만 심지어 부르주아지조차 사랑에 허우적거린다. 어쩔 수 없이 인정하기는 하지만 표현하기는 꺼림칙한 사랑에 말이다. 사랑은 주체의 영역이기도 하지만 또한 공식적 승인을 받아야 하고 감정과 돈이 지배하는 불안정한 휴일이다. 사랑은 당신을 사랑하기 전 자신으로 금세 다시 돌아가게 내버려 둔다.
 
통제되지 않는 마음상태를 너무나 분명하게도 축하카드, 결혼증서, 웨딩케익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제어해야 한다. 사랑은 예측할 수 없고 무질서하고 노사관계에 좋지 않다. 사랑은 너무 단순하고 너무 어렵고 충분히 소비하지 않는다. 효율적인 사업의 성장을 위해서 사랑은 오직 생애 한 번이면 족하다. 사랑의 감정은 규제되고 웨딩케익과 웨딩드레스에 포위되어 가능한 바르게 행실 하도록 해야 한다. 아예 존재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또 사실 어떤 이들에게는 존재하지 않지만, 사랑이라는 가려움증은 긁어내거나 제거하기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랑을 뭔가 아주 다른 것으로, 케케묵었지만 위안을 주는 감정으로 바꿔야 한다. 남자들에게 사랑은 발견하는 게 아니라 구매를 강요당하는 섹시 성욕 시합들을 탐닉하는 게 되어 버렸다. 섹스 자체가 그 자신의 규칙과 게임을 가진 일(work)이 된다. 섹스는 결혼이라는 검은 비닐봉지 속으로 갇힌다. 결혼은 그 핵심이 자발적인 특성처럼 느끼는 계약일 뿐이다. 상업, 결혼, 학문에 맞섰던 최초의 반항아 블레이크가 말했듯이 사랑만이 통제아래서 사그라지는것은 아니지만 사랑은 사랑의 형식들 때문에 땅에 묻히고 성적 사랑은 가식적 연기(act)가 된다.
 
감각의 메아리나 깨지지 않는 주체성은 농담일 뿐, 유지하기가 불가능하다. 이런 사랑은 여유가 필요한데 축구장 다섯 개쯤의 공간은 있어야 한다. 현실에서 이런 사랑은 부자들만 누리는 특권이다. 나머지 우리들은 발레 댄서와 공주들의 사랑이야기를 읽을 따름이다. 보통의 사랑은 질투와 정절이라 불리는 경비가 지키고 있는, 그 자체의 회사에 결박당해 있다. 한 달에 한 번은 친구와 친척들에게 불려 나가야 하고 TV와 기저귀 아래 질식당한다. 사랑의 은폐된 이면이 드러나고 열정은 이제 그 대가를 요구한다. 한때 평등했던 사랑은 전복되고 이제 노동분업의 대상이 된다. 남자는 바깥 세계에서 일을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채워주고 유지시켜 줘야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남자는 사랑을 채우고 화를 달래고 먼저 생각하고 토닥이고 희생하다가 신기하게도 사랑 때문에 쓰디쓴 외로움을 느낀다. 사랑의 노동은 그저 또 다른 노동이 된다.
 
사랑은 빠르게 폭압으로 변할 수 있다. 사랑이라는 말은 개뼉다귀와 같은 말이 된다. 사랑은 갑자기 손찌검, , 위협이 된다. ‘엄마 사랑하지?’라는 물음은 엄마가 잘 해주니까 보상해 달라는 뜻이 된다. 지역신문에는 엄마가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아이를 칼로 찔렀다라는 기사가 실린다. 사랑은 자발적이지 않은 것, 상품교환권이 되고, 약속해야 하는 것, 저장하고 교환할 수 있는 것이 된다. ‘사랑은 아픔이라는 진부한 말이 쓰디쓴 진실이 된다. 사랑의 부드러움은 거친 폭력으로 바뀐다. 파산한 알콜중독자뿐만 아니라 젊고 유능한 기업경영자도 사랑의 기쁨이 사라지면 폭력에서 섹시함을 찾는다.
 
폭력은 아내가 당하는 직업병이다. 애완견에게는 상냥한 남자들이 정기적으로 배우자들을 폭행한다. 하지만 천천히 사라지는 사랑도 끊임없는 죄의식·두려움·탈진을 낳는 또 다른 고통이다. 사랑은 선서나 가책, 후회가 된다. 숟가락에 낀 기름이고 노래의 후렴구가 된다. 여자는 쉽게 기억을 놓지 않아 감상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기억을 곱씹으며 여보야 빨리 집에 와를 쫓는 것은 자칫 메스껍고 느글느글한 낭만주의(romanticism)를 부르기 쉽다. 사랑 없는 결혼의 증거들은 드러나지 않고 기록되지 않는다. 현관문 앞에서의 불평과 이웃과의 수다, 술집에서의 위로 속에 숨어야 하고 가능하다면 바깥 세상에 알리지 말아야 한다.
 
가족의 경제 구조가 어떻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훼손하고 불평등한 남성과 여성의 관계가 어떻게 연인들을 격투기 상대로 만드는 지가 대륙 전체를 굶주리게 하고 도시들 전체를 파괴하거나 흉악하게 만드는 자본주의 체제의 가장 커다란 범죄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가장 슬픈 범죄 가운데 하나다. 한 때, 삶 자체를 지배하던 느낌들은 단순히 기억으로 남는다. 그 순간이 비웃음의 대상이 된다. 결혼과 타락한 돈이 결합되면 사랑은 더 이상 느낌들과는 무관한 어떤 형식이 된다. 사람들은 분류되고 결혼을 향해 행진한다. 친척들은 등 뒤에서 조롱 섞인 농담들을 건네고 혼수품 목록이 정해진다. 가족은 스스로 돈을 대어 경쟁적으로 소비하고 세뇌하기에 편리한 단위다. 안전하지 않고 돈 한 푼 들지 않으며 제대로 평가받지도 못하는 여성 노동력으로 생산, 수리, 재생산이 이뤄지는 진정한 혹사공장이다.
 
자본주의 국가로서는 싸게 부리는 것이다. 제대로 된 공공교통이나 아이들에 대한 무상 보육, 개인 식당들보다 싸고 질 좋은 음식을 내놓는 지역 공공식당, 비싼 유흥시설보다 더 싸고 더 큰 즐거움을 제공하는 지역 공동체 시설들을 세우는 것보다 훨씬 쉽다. 이런 일들을 개인들이 집에서 혼자 힘들게 비효율적으로 돈을 많이 들여 하고 있다. 그리고 나선 TV 앞에 앉아 행복한 가족이 밥을 차리는 걸 멍하니 바라본다. 가족은 안정을 제공하고 우리가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한다. 가족이 깨지고 있다면 실망할 일이 아니라 기뻐할 일이다. 우리는 깨진 조각을 다시 맞추려 노력할 게 아니라 가족의 대안을 찾기 시작해야 한다. 그 대안이 실현되도록 하는 기관과 시설들을 요구해야 한다.
 
원문 https://oxfordleftreview.com/olr10-15/
번역 최용찬
 
* 저자인 데이비드 위저리(1947-1992)는 영국의 트로츠키주의 저자, 논평가, 의사, 활동가였다.
 
** 이 문장 앞 문장은 당신이 덜 먹고, 덜 마시고 책을 덜 사고, 극장과 무도회장에 덜 가고, 덜 사랑하고 덜 공부하고 덜 노래하고, 그림을 덜 그리고, 정원을 덜 가꿀수록 더 많이 저금할 수 있다. 좀 슬지도 녹슬지도 않는 당신의 보물, 당신의 자본이 더 커진다. (1844년 경제학 철학 수고).
 

번역자의 한마디 : 번역이 매끄럽지 못하고 심지어 오역이나 지나친 의역이 있을 수 있다. 모두 번역자의 능력부족 탓이다. 번역에 대한 지적은 언제든지 환영한다. 저자가 이 글을 1972년에 썼다는 것을 감안하고 읽어야 한다. 내 생각으로는 당시와 달리 지금은 결혼과 가족제도라는 법적, 제도적 질서를 통해 사랑을 통제하고 얽어매는 것을 넘어 사랑과 연애(로맨스)마저 상품화가 매우 급속하게 진전되었다. 상품화된 사랑을 구매할 수 없는 이들이 스스로 사랑을 포기하는 모습을 현대인들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소위 삼포세대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상품화는 이들을 겨냥한 소위 데이트산업, 심지어 '데이트 게임'산업으로 확대된다. 현대 자본주의 아래 상품화된 사랑, 또는 사랑의 상품화에 대해 보다 깊이 고민하고 공부해 봐야겠다. 여성이론연구소에서 몇 해 전 <후기자본주의와 로맨스>라는 주제로 맑스코뮤날레에서 발표한 적도 있고, 이 글의 제목과 비슷한 <사랑은 왜 아픈가>라는 책이 번역되어 출판되어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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